청원 2만 명 넘긴 한샘 사태... 회사 성범죄 문제 커가는 이유는
서울고용노동청은 7일부터 15일까지 한샘을 대상으로 수시근로감독을 실시한다.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 여부,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징계 등 조치 여부,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들여다 보고 위반사항이 적발되면 법적 조치를 취할 계획이다. 피해자 A씨(24)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태율 김상균 변호사는 지난 6일 검찰에 수사 기록 전체를 달라는 정보 공개 청구를 했다고 밝혔다. A씨 측은 한샘에도 징계 기록 제공을 요청할 계획이다.
가구업체 한샘의 신입 여직원이 사내에서 잇따라 성범죄를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6일 서울 서초구 한샘 본사. [연합뉴스]
한샘 사태 이후 현대카드에서도 직장 내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는 주장이 온라인 게시판에서 제기돼 논란이 됐다. 자신을 현대카드 위촉계약사원이라고 밝힌 B씨는 지난 6일 글을 통해 동료 직원과 술자리 후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현대중공업도 지난달 술자리에서 임원이 여직원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해 가해자가 퇴사했다는 사실이 지난 5일 알려졌다. 이 회사는 매년 술자리에서 성추행 등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져 구설수에 올랐다.
이처럼 최근 사내 성범죄 사건이 예전에 비해 자주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은 왜일까? 여성계 등에서는 아래의 세 가지를 주요한 이유로 꼽는다.
①달라진 의식- "억울하게 참지 않아"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직장 내 성범죄 상담은 2014년 300건(전체 상담의 20.8%)에서 2016년 368건(27.2%)로 늘었다. 경찰청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 통계도 2012년 341건에서 지난해 545건으로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사건 자체가 늘었다기보다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는 피해자들의 자각이 많아진 것으로 분석한다. 여성단체 등 현장에서는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신이 겪은 일을 드러내는 피해자가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피해자들이 '내가 말 못 할 이유가 뭐냐, 수치심은 내가 아니라 가해자의 몫이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풀이했다. 그는 "사내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인터넷 폭로로 알려졌는데, 앞으로 이런 일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최근 전세계에서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 추문으로 촉발된 성폭력 고발 해시태그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확산 중이다. '#미투' 를 단 SNS 폭로 글로 유럽과 인도까지 사회 지도층의 성희롱·성추행 의혹이 드러났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문단을 시작으로 '#○○○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②활발한 SNS·온라인 커뮤니티
지난 4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한샘 성폭행 사건에 대하여 올바른 수사를 요청합니다' 청원은 나흘 만에 2만명 넘는 사람이 동참했다. 청원글에는 "2017년 11월 3일 올라온 한샘 사내성폭행에 대하여 피해자의 신변보호와 가해자들의 올바른 수사와 처벌을 요구한다"고 쓰여 있다. 지난 3일 한 온라인 게시판에 게시된 피해자의 글을 보고 청원을 올린 것이다.
피해자의 글은 온라인 커뮤니티과 SNS를 타고 빠르게 퍼져 대중의 공분을 샀다. 여성 회원이 많은 대형 온라인 카페 여러 곳에는 "의식 있는 소비자들은 불매운동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세일해도 사지 않겠다. 언론 플레이가 아니라 힘없는 사회 초년생 여직원 우습게 보지 않은 회사가 됐으면 좋겠다" 등 한샘 제품 불매 의사를 밝히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일부 홈쇼핑 업체는 소비자들의 반감을 고려해 예정됐던 한샘 제품의 판매 방송을 연기했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구매력을 이용해 기업의 부족함을 꾸짖고 윤리 경영을 장려하는 '착한 소비'를 추구하는 트렌드가 공론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달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3%가 '소비를 할 때 기업의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답했다. 2년 전 같은 조사에 비해 5.6%p 상승한 비율이다.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매한 옥시레킷벤키저 불매 운동, 판매사원으로 비정규직을 뽑지 않는다는 오뚜기 제품 구매 독려가 대표적이다. 사내 성폭력에 대한 기업의 관리 책임과 후진적인 조직문화까지도 소비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다.
③시대에 뒤처진 교육, 대응에 미숙한 조직 문화
국내 성범죄 관련 법·제도는 정비됐지만, '이를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의식 수준은 여전히 낮다.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10인 이상 회사는 대표자를 포함해 근로자 전원이 연 1회 60분 이상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미실시하면 과태료 300만원이 부과된다. 이관수 노무사는 "성희롱 예방 교육 의무화돼 있어도, 대신 출석 사인만 하거나 듣다가 나가는 분위기다. 지키지 않아도 처벌이 약하다"고 말했다. 또 "회사 내 고충 처리위원회도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가 많다. 진짜 고충이 생겼을 때 믿고 전화할 수 있는 기구로 만들어놔야 한다"고 했다.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글을 남긴 한샘 직원 A씨의 경우도 사건 직후 회사가 아닌 연락처를 아는 경찰에게 먼저 조언을 구했고, 회사는 경찰을 통해 사건을 인지했다.
조인선 노동법 전문 변호사는 "가해자가 상사, 피해자가 저년차 후배인 경우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 피해자가 진술 번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가 이런 생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회사가 진상 조사를 더 적극적으로 해야 했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 사옥 출입 제한 등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손경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위촉 전문강사는 "적극적 동의와 암묵적 동의가 다르다는 기본적인 젠더 의식도 보편화되지 않았다"며 "'좋다' '하고 싶다'는 적극적 동의를 듣지 않았다면 '오케이'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설명한다. 손 강사는 "'당사자 둘이 해결할 일'이라는 시각도 문제다. 당사자 외에 두둔하거나 침묵한 조직 전체가 문제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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