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저임금‘法’에 다시 생각한다
최저임금법이 2018. 6. 12. 개정되어 그 시행일인 2019. 1. 1.부터는 ‘상여금, 그 밖에 이에 준하는 것으로서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임금의 월 지급액 중 해당 연도 시간급 최저임금액을 기준으로 산정된 월 환산액의 100분의 25에 해당하는 부분’, ‘ 식비, 숙박비, 교통비 등 근로자의 생활 보조 또는 복리후생을 위한 성질의 임금으로서 통화로 지급하는 임금의 월 지급액 중 해당 연도 시간급 최저임금액을 기준으로 산정된 월 환산액의 100분의 7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최저임금에 산입되지 않게 됐다.
거꾸로 말하면 기존에는 최저임금법 위반여부를 따질 때 산입되지 않았던 상여금 일정기준 월 환산액의 75%, 식비 내지 복리후생비의 일정기준 월 환산액 93%가 산입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저임금위원회가 2018. 7. 14. 새벽 내년도 최저임금을 올해 대비 10.9% 오른 시간당 8350원으로 의결하였는데 이에 시민사회와 노동계, 사용자 모두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노동계에서는 현재의 상승폭으로는 2020년 최저임금 10,000원을 맞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여금이 일부 최저임금에 산입되게 되어 실제로 수령하는 임금이 더 작아지는 근로자도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편, 편의점주 등 소상공인 측에서는 최저임금이 이렇게 인상되면 인건비 부담으로 인해 직원을 사용할 수 없게 되므로 시민불복종 차원에서 이를 따르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직장 내 갑질이나 일부 부유층의 갑질이 문제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최저임금법을 둘러싼 논의는 ‘갑’과 ‘을’의 다툼이 아니라 ‘을’과 또 다른 ‘을’의 생존을 위한 논의의 장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갑’ 역시 고용을 줄인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4차산업혁명의 시대에 특히, 수출증가율이 호조세를 보이고 있는 현 시점에서 타당한 이야기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法’에는 입법자의 의사가 들어가고 입법자의 의사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10년 뒤, 20년 뒤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시계를 뒤로 돌려 산업혁명의 시대로 돌아가본다. 산업혁명 당시인 1802년경 유럽의 자본가들은 일곱 살 정도 되는 아이들을 공장에서 일하게 했다.
탄광의 고용연령은 4살부터, 모직공장에서는 6살부터, 면직공장에서는 8살부터 아이들이 일을 하였고 하루의 노동시간도 12~18시간에 달했다.
자본가들이 저임금 노동을 강요할 수 있는 아이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아동노동이 당연한 것,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던 중 1833년 공장법이 개정되었고, 아동노동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비스마르크는 아동노동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아동노동이 금지되자 많은 공장주들은 이제 더 이상 공장을 운영할 수 없다며 세상이 곧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우리 모두는 이제 더 이상 아동노동을 찾아볼 수 없는 선진사회에서 살고 있다.
‘法’은 당위를 담아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법이 있을 수 없겠으나 당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많은 유예조치 내지 지원금, 보조금 등의 형태로 다가온다.
정부에서도 인건비 일부를 보전하거나 4대보험료 일부를 부담하는 등의 대책을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물가는 그보다 더 큰 폭으로 오르곤 한다. 생활임금 논의가 이루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자영업자, 저임금근로자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를 바라보며 최저임금‘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관련 기사 링크 : http://www.speconom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997#_enliple